요한복음 16장 25-33절 묵상
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배경 / 다락방 담화의 마지막 부분
"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
"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
"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
1) 내가 " 그 날 " 을 위해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2) 꾸짖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안을 얘기하시는 주님, 주님은 왜 꾸짖지 않으실까?
■ 나는 주님을 다시 만나는 그 날 을 위해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주님께서 자격을 나에게 주심에 감사하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인데 주님은 나에게 주님께 물을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 자격은 "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
"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믿었고 " "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신다 " 이것 때문이다.
나는 주님을 다시 만나는 그 날 을 위해 오늘도 성령을 구한다. 성령님이 친히 예수님을 믿게 도와주시고
내가 주님과 관계하여 얻는 기쁨까지도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알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이 아니면 지금 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지도 나는 알지못한다. 아니.. 안다고 착각속에 살았었다.
" 내 맘이 평안하니까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거겠지? "라고 착각을 했다.
그냥 " 내 몸이 편안하고 내 맘에 문제가 없으니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겠지? " 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나 진짜 주님과 성령이 주시는 평안은 고난 중에서도 발휘되는 온전한 평안인 것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무너지거나 상심하는 것이 아닌 주님께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내 마음의 상태가 평안인 것이다. 이 상태가 성령이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이다.
항상 주님의 마음이 뜻이 어디에 있는지 내 시선과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내 생각을 멈추고 주님께 묻는 것 자체가 나에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다
■ 주님은 꾸짖지 않으신다. 그리고 " 내가 세상을 이기었기에 담대하라고 하신다 "
주님은 제자들의 상황에 따라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말씀을 하시기에 제자들이 알아 듣는 척을 해도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 지금은 너희가 모를꺼야, 때가 이르면 (성령을 받으면) 알게 될꺼야 "
" 평안을 누리기도 힘들꺼야. 너희는 다 나를 떠나거든. 그래도 평안하렴 "
" 괜찮아. 내가 세상을 다 이기니까.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는 길이거든 "
평안할 수 없을 것임을 알고 계신다. 그래도 꾸짖지 않으신다. 평안을 누리라고 까지 말씀하신다.
이후에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도 계속되는 환난이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승리하였고 너희도 반드시 부활을 할 것이니 평안하라! 믿어라! 기쁨으로 충만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이것 또한 믿음의 문제인 것 같다. 내가 평안하기로 선포하고 선택하고 믿으면
이 후의 모든 상황들도 그렇게 되지만 계속되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생각을 끌고 나가면
진짜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평안이 없어지는 것이다. 부활을 믿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안에서 평안을 누려라, 환난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담대해라!
기뻐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 이긴 싸움이다.
결과는 정해져있다.
그러니 담대하게 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