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 예수님, 빌라도, 유대인들, 대제사장들, 로마 군인들, 마리아, 예수님 이모,
막달라 마리아,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요한
배경 / 골고다 (해골)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예수님. 좌우에 다른 죄인들과 함께 달리신다.
빌라도는 십자가 위에 글을 쓴다 "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이 말은 히브리와 로마, 헬라 말로 기록되었다.
대제사장들이 얘기한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그러나 빌라도는 " 내가 쓸 것을 썼다 " 하며 그대로 진행한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찢고 서로 나눠가진다. 십자가의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그리고 간음하다가 돌로 맞을 위기에 예수님이 구해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말한다.
" 보라 네 어머니라 "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신다
1)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 YHWH
2) 새로운 가족 공동체 교회
◆ 유대인의 왕이라! 빌라도의 말에서 선포된다. 즉위식이 이루어졌다! 설명에 이렇게 나온다.
세상 왕국의 종을 사용하셔서 메시아 왕위 등극식을 행하신다. 정말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신다.
나는 십자가를 이제껏 어떻게 바라봤는지 생각해보았다. 그래도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내가 달려야 하는데..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대신 주님이 죽어주셨네. 나를 살리셨네.. 라는 것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삶을 살고 있나.. 라고 했을 때는 그것은 다른 문제이다.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서 사는 삶을 살고 있다. 온전히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릴 때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는 아주 흉악한 범죄자나 정권을 위협하는 역적을 징벌하는 굴욕적 사형 도구라고 했다.
그런 곳에 주님이 달리셨다. 왕으로써..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까지도
예수님이 하셨던 많은 말씀들을 다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 내려서 삶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뿔뿔이 흩어져 버린 것이 그 증거인 것이다.
주님이 그런 곳에 달리실 분은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 목숨을 다 하면서까지 십자가 형벌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 죽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왜? 아직은 주님이 제자로 부르신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왜 부르셨고 왜 같이 사셨는지
3년 동안이라는 시간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많은 기적과 말씀들이 나를 위해서 오신 것이 분명한데
이 땅에서의 부와 편안함이 아닌 바로 죽었던 영을 살리시고 죄 중에 묶인 우리를 자유케 하시러 오신 것을
주님의 부활과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이지 그 전에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알지 못해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일일이 설명하시지 않으셨다. 반드시 깨닫고 제자들이 어떻게 죽임을 당할 것인지 까지
이미 아셨기에 하나하나 설명하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깨닫고 완전히 내가 주인 된 삶이 아닌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살게 되는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을 믿고 기다려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달리신 주님의 사랑이 내게도 마음으로 깨닫기까지 4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내가 진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 주님이 없으면 안돼요 ' 라고 내가 마음으로 고백하기까지 40년이 걸린 것이다.
주님을 알았다. 교회도 다녔다. 그리고 주님도 만났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십자가 사건이 바로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주님이 대신 죽어주신 것이라는 것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고백하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기다려주시고 떠나시지 않으셨다.
이런 나라는 것을 다 아셨는데도 말이다. 그게 진짜 사랑이고 믿음이자 소망인 것 같다.
나의 상태와 지금의 모습과는 상관없는 믿음, 소망, 사랑
그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원래 이렇게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없이는 진짜 창조 목적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많은 기쁨과 평안을 알 수 없고 방황하면서
결국 남도 죽이고 나도 죽게 되는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빨리 돌이키고 돌아오시기를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시고
사랑하시는 것이다.
나도 지체들을 지금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모든 게 행위의 문제가 아닌 죄의 문제이고 이것은 결국 주님의 승리로 끝났으며 반드시 하나님이 일하시고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주님과 같이 내가 죽을 때
그 사람도 변화될 것이라는 소망, 그리고 죄와 싸워주는 진짜 참 사랑, 이런 주님의 모습을 따라가고 싶다.
◆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예수님, 그리고 마리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요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시작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모두 모이게 되었다.
그분이 친히 찾아오셨고 그 부르심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으로 살게 되었다.
공동체.. 좋은 단어이기도 하지만 그냥 모여 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목표와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서로가 진실하게 대화하며 이해하는 진짜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내 이익이 없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이야기한다. 함께 공동의 이익을 위해 모여서 의견을 제시하고 실천해 나가는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보여주는 것도 협동조합을 통해 많이 볼 수 있다.
생각보다 조합이 많이 무너지고 사라진다. 그만큼 내 이익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사도행전에서 보인 초기의 성령 공동체가 진짜 공동체의 모습이다. 내 것을 나누고 베푸는 것.
말씀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복음으로 성령으로 하나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 이익보다는 주님을 위해 사는 삶, 그분을 따라 사는 삶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을 때 가능한 것 같다. 더욱 내가 오늘 어떠한 죄인인지 그리고 그런 죄가 나를 얼마나
사로잡고 있는지 영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 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공동체 생활도 했었다. 마냥 어렸을 때 너무 감사했지만 실제 그 안에서의 문제는 나중에 나와서 알게 되었다.
죄를 덮어주는 게 사랑이 아니라 죄와 치열하게 싸우는 게 진짜 참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다. 사단의 모든 권세를 무너뜨리시기 위해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그게 아니면 안 되니까.. 그리고 부활하시고 성령도 약속하셨다.
왜? 그게 아니면 안 되니까! 나로서는 그 죄를 이길 수 없으니까 말이다. 백전백패 하니까.
그러나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의 통치를 받는 성령 충만한 삶을 고백하고 붙잡는 다면
어제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주님이 약속하셨으니까!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니까
매일 성령님을 구하고 의지하며 내 안에 있는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내어드리는 정직한 삶을 살길 기도한다.
'말씀 QT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한복음 19장 38-42절 묵상 (0) | 2020.03.16 |
---|---|
요한복음 19장 28-37절 묵상 (0) | 2020.03.15 |
요한복음 19장 1-16절 묵상 (0) | 2020.03.11 |
요한복음 18장 28-40절 묵상 (0) | 2020.03.10 |
요한복음 18장 15-27절 묵상 (0) | 2020.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