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 예수님, 빌라도,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유대인들)
배경 / 예수님을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서 빌라도를 만난다.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말한다 "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
"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묻는다 "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
"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가 한 말이냐 "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
빌라도가 다시 묻는다 "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
"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으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 유대인들에게 말한다 "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
"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
유대인들이 말한다 "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 바라바는 강도였다.
1) 빌라도는 왜 그렇게 예수님과 대화를 했을까?
2) 유대인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석방하려 했다. 그러나 민란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내 몰았다.
그런데 계속해서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한다. 마태복음 27장에서는 빌라도의 아내가 말한다.
"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
빌라도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별로 화도 안 내는 것 같다.
네가 왕이냐? 라고 묻자 예수님도 내가 왕이다!라고 했으며 " 진리 " 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다.
빌라도는 이 " 진리 " 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왜 이 짧은 대화 속에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라고 생각했을까?
빌라도의 이름은 " 창을 가진 자 "라고 한다. 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이고
유대 총독은 유대인들의 사형집행권과 대제사장 임면권을 가지는 등 군사, 사법, 종교 등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고대 문헌들이 전하는 빌라도 총독의 면면들을 살펴보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처형한 자’(Tacitus, A.D. 55-120년경),
‘뇌물을 좋아하고 신을 모독하며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은 재판을 하고 근거에도 없는
중형을 내리기로 유명한 자’(Philo)로 소개된다. - 네이버 빌라도 인용 -
빌라도는 손을 대기 싫었다.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다툼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일로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 진리가 무엇이냐 " 라는 말에 영국의 한 작가는 굉장히 조롱하고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 " 희롱하는 빌라도 " 라는
표현을 적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빌라도는 자신의 위치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에게도
" 너희는 뭘 해도 안 되는 것들이야 " 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 위치가 당장의 유익과 평안을 주기 때문에 진짜 이후에 있을 많은 역사에 내 이름이 어떻게 올라갈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빌라도가 무죄라고 생각한 것은 진짜 죄가 없음을 판단하기보다는 지금 너희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에는 의미가 없으니까
그냥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 라는 아주 근시안적이고 주어진 자리에서 충성스러운 역할을 하지 않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나의 위치와 평판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 진짜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을 쉽게 타협하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빌라도는 형식적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것 같다. 유월절이기 때문에 오랜만에 예루살렘에 와서 경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으로 인해 민란이 발생하거나 자신의 자리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가서 물었다가
다시 예수님께 와서 말했다가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빌라도에게 " 진리 " 는 본인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내가 진리이다! 내가 정의이다! 내가 변하지 않는 힘이다!
그것을 유대인들과 예수님.. 로마 병사들까지도 모여있는 그 모든 자리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그 결과 평생에 예수님을 죽인
로마인으로 사도신경에 지금 이 시간까지 거론되고 있는 엄청난 한 마디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무죄이기에 바라바 또는 예수님을 둘 중에 하나를 풀어줄 것 까지 제안을 했지만 결국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하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바라는 정치적인 선동가라고 많이 해석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유익하고 내가 보기에 의롭지 않은
많은 선택들이 후일에 어떤 식으로 돌아올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늘 내가 선택해야 하는 많은 것들 중에
주님께 더욱 묻고 의지하여 나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쓰임 받기를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내 유익보다는 주님의 마음을 더욱 알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시선이 있는 그곳에 나의 마음과 눈이 있기를 원합니다.
◆ 유대인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메시아일까?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그들이 진짜 원했던 것은 자신들의 위치가 계속 전승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솔직하게 그들은 지금의 로마 속정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관정에 들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더라도 그렇다.
본인들은 유월절을 거룩하게 (본인들 생각에) 보내고 싶으니 관정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대신 빌라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하고 자신들의 입지는 더욱 강화하는 진짜 영악한 인물들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율법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지키고 싶은 것은 내가 아니었을까? 나의 위치와 자리가 아니었을까?
그렇기 때문에 바라바냐? 예수냐? 하는 선택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선동자의 바라바는 자신들의 편에 있는 자이고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에
진짜 기적을 그렇게 많이 보고 듣고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믿어도 본인들이 그리는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기 때문에
바라바를 선택하고 진짜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는 무서운 사람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나에게 없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메시아일까? 아님 이 땅에 편하게 살고 내 영광을 구하는 것일까?
계속되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유대인들의 대화 속에서 나의 진짜 원함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나도 솔직히 내 영광을 많이 구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속에서 다 결정한 것이다.
진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과 같은 관계 안에 있었다면 예수님께 대하여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으니 내 생각과 옳음으로 다 끝내버린 것 같다.
나도 자주 그런 모습들이 있었다. 내가 맞다고 생각되는 것들도 하나님께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넘어가고 이해했다고 하면서
마음속에서 지워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이렇게라도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는 깊은 것을 보게 하시고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다 꺼내놓으시길 기다려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계속되는 말씀과 묵상 속에서 내가 주님과의 관계를 더욱 붙잡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묻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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