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뛰쳐나간 가룟 유다, 많은 군인들과 대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의 하수들
배경 / 다락방 담화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마무리하시고 나오셔서 기드론에 있는 동산에 가신다
가룟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에 왔다
"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
"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말고라 하는 대제사장 종의 귀를 베어버린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
그리고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끌려간다
1) 기도를 마치신 후 본인이 끌려가시는 길을 가신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이 붙잡은 것은?
2) 베드로의 칼 VS 예수님의 말씀
◆ 누가복음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나온다. 겟세마네 (기름 짜는 틀)에서 땀이 피가 되듯 기도하신다.
그 기도에서는 "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라고 기도하신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그런 기도는 나오지 않고 바로 가룟 유다로 넘어간다. 하지만 17장에 이미 하나님과 하나 된 것 같이
제자들에게도 하나되기를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는 것 같이 제자들 그리고 우리들도 말씀과 성령으로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다
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길임을 더욱 붙잡고 믿음으로 한 걸음 나아가신다.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시는 것이다. 조금 있으면 끌려가고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인지를
다 아셨지만 막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주님을 너무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너무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계셨기에
그 길을 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도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 일들이 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순종해야할지 안다. 어떻게?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내가 안다. 원래 나라면 절대 생각나지도 않은 것들이 마음이 움직이며 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면 내 마음이 너무 기쁜 것을 안다.그런데! 알면서도 안 하는 경우도 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이 이런 것 같다. 불순종의 영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나도 기도를 하고 주님 도와주세요 하면서 자리를 잡으면 시작하게 된다.
결과가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내가 주님에게 내 마음을 먼저 드리는 것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이다
스스로 하면 참 기분이 좋다. 왜 그런지 난 안다. 내가 주님안에 있는 것을 내가 스스로 느끼고
주님이 날 인도하시고 계시는 것을 더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쓰는 묵상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과 더 깊이 하루를 보내고 그것으로 내 삶이 주님과 더 같이 살고 있는 것. 그 자체가 너무 좋아서 하는 것이다.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잘 알고 하나되어서 스스로 하는 모든 순종의 걸음이 매일 나의 기쁨이 되길 소원한다.
◆ 베드로는 칼을 휘둘렀다.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 같다. (모르겠지만.. ㅎㅎ) 그런데 예수님은 말고의 귀도 고쳐주시고
베드로에게는 칼을 칼 집에 넣으라고 하신다. 베드로의 칼은 권세와 권력, 힘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자신의 위치와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그 반대로 그 자리를 빼앗고
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력과 힘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 결과 누군가는 죽게 된다. 마음과 육신 모두가...
베드로의 칼은 누구를 죽이는 힘이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칼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 칼로 인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될수도 없었고 그렇게 베드로를 사용하고 싶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 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은 누군가가 죽는 것이 아닌 예수님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높은 자리와 내가 원함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그의 아들을 죽임으로 대속시킴으로써
죄에서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태초에 하나님이 만드신 그 형상대로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이 진짜 우리를 사랑하시는 본질인 것이다.
나는 칼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가? 말씀으로 사랑으로 이루려 하는가?
내가 원하는 세상과 방법인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령의 지혜로 행하는 방법인가?
매일 묻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느낌이 오늘 좋아서 내가 경험했기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먼저 엎드리어 나의 죄를 회개하고 철저히 나는 죽고 주님으로 사는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 오늘도 주님 앞에 나는 죽기를 소원합니다.
내가 들고 있는 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 오직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먼저 변화시켜주시고 내 삶이 변한 것을 이웃들이 보고 느끼며
주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인도하여주시옵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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