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 예수님과 제자들
배경 / 다락방 담화를 끝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말씀하신다.
"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
1) 영생은 참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아는 것은?
2) 나의 사명..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오늘도 이루고 있는가?
■ " 아는 것 "이란 무엇일까? 내가 1+1 = 2를 아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수학자들은 1 + 1 = 2 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연구하고 노력하고 찾고 묻고 실패하고 또 좌절하다가
하나의 길을 찾아서 기뻐하고 증명했을 때야 비로소 안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이렇게 맹목적으로 아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만나서 함께 동행하고 살면서 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로서 주인으로써 아버지로서 목자로써 역할이 계속 변하게 되는 것 같다.
왜! 살아계셔서 나랑 관계하며 지내고 있으니까
내가 나쁘고 다른 길로 갈 때는 반드시 나를 채찍질하면서까지도 옳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내가 아프고 슬플 때는 누구보다 나를 더 품어주시고 사랑해주실 것이다.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게 아는 것 같다.
나는 멋대로 주님을 안다고 생각한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믿었다. 왜 내게는 주님이 찾아오셨으니까 그 주님이 믿으니까!
그런데 내게 찾아오시는 주님의 방법과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가시는 주님의 방법은 다른 것인데
나는 내게 찾아오신 주님만 맞다고 주장했었다. 만났으니까! 그런데.. 살지는 못했다..
결혼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선 한 번에 만나서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나고 또 만나서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떤 것을 싫어하고 좋아하고 어떻게 자라왔으며 묻고 또 대화하면서 알아가는 것이다.
이런저런 과정을 보내고 난 후 그리고 같이 사는 것이다.
주님과의 동행과 결혼과 같다. 한 번 만났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정작 살지는 못한 것 같다. 좋은 모습.. 내가 기대하는 모습만 예수님이라고 단정 지었다.
실제 예수님께는 대화하거나 묻지도 않고 묻고 대답하시기 전에 내 멋대로 결정지어버렸다.
조금씩 주님과 같이 살고 있는 지금이 가장 감사하다. 주님께서 나를 택하신 것에 대해서 너무 인정이 되고
이런 나조차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으니까 난 주님과의 깊은 관계를 누리는 삶까지..
진짜 주님과 매일 살고 싶다. 아무것이라도 재잘재잘 얘기하며 함께 눈과 눈을 마주하며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같이 공유하며 같이 나누는 삶을 오늘도 살길 기도한다.
■ 나의 사명.. 거창하게 하나님이 내게 하라고 하신 일.. 뭘까?
그런데 지금 일도 일이지만 이 시간도 굉장히 하나님께서 주신 엄청난 선물인 것 같다.
이 시간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게 기다려주시고 받아주신 것 같다.
지금 내게 주신 이 시간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런데 여전히 나의 시간인 것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다.
주님.. 회개합니다. 시간의 주인은 주님이신데 제가 멋대로 제 인생에 낭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음을 용서하시고 더욱 더 주님께 맡기고 지혜롭게 시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세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다. 왜? 주셨을까? 나는 고되고 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자리인 것 같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어느 때든지 주님께 묻고 찾는 곳으로
지금 내가 있는 자리를 허락하신 것 같다. 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인되심을 더욱 철저하게
인정하는 자리가 바로 지금의 자리인 것 같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내가 잘해서? 내가 이 분야의 전문가라서? 15년 이상을 해 왔기 때문에? 다 아닌 것 같다.
주님이 나를 받아주신 것이고 주님께서 지금까지 돌보아주셨기에 일도 배울 수 있었고 15년 이상을 참아주셨기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 때문에.. 알 수 없는 그 사랑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 소요리 문답에서 1번 사람이 사는 이유라고 하셨다.
이제서야 주님을 보니 조금 알게 되는 것 같다. 주님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만나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과 항상 함께 하려고 애쓰고 또 애쓰시는 모습이다.
나도 주님과 항상 함께 하려고 애쓰고 또 애쓰고 있다. 기쁨으로 ㅎㅎ
이렇게 하루하루 묵상하며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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